장애인등록 거부처분 취소 관련 감염인 당사자 & 단체 탄원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8-20 20:40
조회
282
존경하는 재판장님께

저희는 이 사건 원고와 같은 질병과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HIV 감염인들입니다.

이 글에 저희의 이름을 온전히 적지 못하고 별지에 일부만 적거나 가명으로 적은 분들이 있다는 점을 먼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에게는 이름을 밝히는 일이 곧 삶의 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탄원서를 쓰는 것은, 이 사건이 원고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저희 모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감염 사실을 알게 된 날을 저희는 모두 기억합니다. 그날 이후 저희의 삶에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몸이 아니라 관계였습니다. 가족에게 말하지 못했고, 직장에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약은 이름표를 떼고 다른 통에 옮겨 담아 먹습니다. 회사 건강검진이 다가오면 결과지에 무엇이 적힐지부터 걱정합니다. 감기나 치통처럼 사소한 이유로 병원에 갈 때도, 진료기록에 무엇이 남을지, 접수대에서 무슨 말을 듣게 될지를 먼저 계산합니다.

병원에서 진료를 거절당했던 기억은 우리 중 많은 이에게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수술 날짜까지 잡혔다가 검사 결과를 받은 뒤 갑작스레 취소되던 날, 다른 병원을 알아보라며 돌아서야 했던 순간, 진료실이 아닌 서늘한 복도에서 들어야 했던 설명들, 그리고 우리를 대하던 손길 위에 갑자기 두 겹, 세 겹 겹쳐지던 장갑들.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겪고 나면, 아무리 아파도 참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치통을 참다 못해 찾아간 치과에서 단지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절당했던 그날 이후, 그는 치과뿐만 아니라 그 어떤 병원 문도 넘지 못했습니다. 고통을 견디고 견디다 결국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4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치아가 모두 빠져버린 사람. 그렇게 병을 참아내다 합병증을 얻고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이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를 위한 법은 없습니다. 저희에 관한 법률은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하나입니다. 그 법은 저희를 신고하고, 검진하고, 조사하고, 처벌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감염인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그 뒤에 저희가 실제로 청구할 수 있는 권리로 이어지는 조항은 없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진료비 지원이나 상담도 법으로 보장된 권리가 아니라 해마다 예산에 따라 달라지는 사업입니다. 감염인 지원의 근거를 법에 명시해 달라는 요구는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요구는 계속 무산되어왔습니다. 저희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이 사회가 저희를 관리의 대상으로는 삼되 지원의 대상으로는 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희는 나이를 먹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감염인이 오래 살지 못한다고들 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약이 좋아져서 저희는 오래 삽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만큼 몸에는 흔적이 남습니다. 저희 중에는 고관절이 무너져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사람, 심장에 문제가 생겨 카테터를 삽입한 사람, 손발이 저리고 감각이 없어 물건을 자꾸 떨어뜨리는 사람, 신장이 나빠져 투석을 앞둔 사람, 시력을 급격하게 잃어가는 사람 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 들면 누구나 겪는 일이 아니라, 오랜 감염과 오랜 치료가 몸에 새긴 흔적이자 고통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도 장애인으로 등록되지 못합니다. 장애유형 열다섯 가지 어디에도 저희가 들어갈 칸이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정도로 걷지 못하는 이웃은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고 장애인 콜택시를 타는데, 저희는 그 신청서조차 낼 수 없습니다. 지원법도 없고 복지제도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저희는 어느 문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고는 저희를 대신해 앞줄에 선 사람입니다. 원고가 이 소송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저희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법정에 자신의 이름과 병명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 어떤 것인지 저희가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중에도 함께 서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가족이 알게 될까 봐, 직장을 잃을까 봐, 살고 있는 동네에서 소문이 날까 봐 물러섰습니다. 그런 저희를 원고는 단 한 번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먼저 나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 소송을 원고 개인의 소송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 재판의 결과는 원고 한 사람의 등록 여부에서 끝나지 않고, 지금 숨죽여 살고 있는 저희와, 앞으로 나이 들어 같은 몸이 될 저희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동정이 아닙니다. 저희를 특별히 대우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장애는 저희의 몸이 잘못되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몸으로는 살아가기 어렵게 되어 있는 사회와 제도 때문에 생긴다고 저희는 배웠습니다. 국가가 누군가를 장애인으로 등록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결함이 있다고 표시하는 일이 아니라, 이 사회가 그를 배제해 왔음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겠다고 약속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그 약속에 저희도 포함되는 것뿐입니다.

재판장님, 저희는 지금도 이름을 숨긴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도 이 사회에서 아프고, 늙고,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부디 원고의 몸에 남은 손상을 병명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기능으로 보아 주시고, 원고와 저희가 제도 안에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기를 간곡히 탄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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